2006년 11월 29일
윤동주의 <병원>
참 고즈넉한 그러나 에로틱하기까지 한 시가 있다. 윤동주의 <병원>이란 시다. ‘진리는 미풍을 타고 온다.’라고 말한 이는 니체였던가. 식물성의 한없이 낮은 숨결이 오히려 시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전문을 보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그는 지금 아프다. 피로하다. 그러나 의사는 그에게 병이 없다고 말한다. 아픔은 있는데 병은 없단다. 대체 아픔의 정체는 무엇일까. 알 수가 없다. 피로할 뿐이다. 그는 병원의 창문을 내어다 본다. 한 젊은 여자가 뜰에서 일광욕을 한다. 병든 여인, 삶의 약동을 잃어버린 여인이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관능에 그는 살짝 압도당한다. 동병상련(同病相憐), 연민은 사랑의 단초(端初)다. 저런 안 되었네, 싶은 마음이 사랑의 베이스캠프다. 얼마나 많은 영화가 울음을 달래주는 위로의 포옹이 격렬한 입맞춤과 정사로 이어지는 장면을 보여주었던가. 연민과 위로는 에로티시즘의 시작이다. 일광욕을 하던 여인이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그는 그녀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그녀가 누웠던 자리는 그녀가 아니다. 그러나 그곳에 그녀의 체취와 온기가 남아 있다. 그녀가 아닌 것에서 그녀를 읽는 페티시즘은 명백히 변태다. 그러나 이런 식물성 변태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아픔과 그녀의 아픔을 잘 알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나만 아픈 게 아니라는 생각, 너도 아파하고 있다는 생각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래서 이 시는 참 착하게 읽힌다. 살짝 흰 종아리를 드러내는 수줍은 에로티시즘이 순정하게 읽힌다. 윤동주의 환하고 착한 이마를 떠올리게 하는 시다. 부쩍 차가워진 아침이 일순 따뜻해진다. 녹차 한 잔을 마시며 빙싯 한 번 웃어본다.
.................................윤동주 시 속의 여자는 Nicoletta Tomas 의 일러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아픈 자에게는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아프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 by | 2006/11/29 11:46 | 시들시들한 날의 시 읽기 | 트랙백 | 덧글(1)







